평생을 교직에 몸담으시다 정년 퇴임하셨던 우리 이모
아이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씨가 되어, 첫 동시집을 출간하셨다. 좀 더 젊을 때 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셨지만, 지금이라도 이 예쁜 글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씀드리고픈 맘. 다람쥐가 겨우내 모아둔 도토리 같은 소중한 글감 씨앗들이 울 이모의 따스한 마음 안에서 하나둘 싹을 틔운 덕에 _ 이렇게 세상에 나와 설렘과 빛나는 순간들을 누릴 수 있는 거라고
이모가 보내주신 동시집의 첫 장에 적힌 _
누가 봐도 딱 선생님이었을 것 같은 이모의 바른 필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칠순이 넘은 우리 이모가 어떻게 이런 귀여운 상상을 하며 글을 쓰실 수 있었을까 감탄이 나올 만큼 정겹고 예쁜 동시들이 가득한 동시집
아마도 울 이모는,
때로는 어린 시절 순수했던 아이로 돌아가, 때로는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던 선생님으로 돌아가 일상의 찰나들을 하나하나 꼭꼭 눌러 담으셨겠지.
책이 출간되기 전 이모의 동시 몇 편을 미리 본 적이 있었는 데 그중 내가 가장 맘에 들어했던 시
'젓가락의 속사정'
아들에게 엄만 이 시가 제일 좋다며 진짜 젓가락이 화가 난 듯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며 읽었더니 진짜 젓가락이 읽는 것 같다며 웃는다.
젓가락의 속사정 (p.38)
오늘도
남 좋은 일만 했어요.
콩자반으로
갈치구이로
계란말이로 소시지로 멸치 볶음으로
또 갈치구이로
심부름 다니느라
쉴 틈이 없어요
맛보다가 뻇기고
간 보다가 뺏기고
왔다 갔다
배고파도
밥 먹을 틈이 없어요
제가
키만 크고
비쩍 마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리고 동시집의 제목이 된 시
‘바람에도 색깔이 있을까?'
이 시는 왠지 이모가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살짝 뭉클해졌더랬다.
이모의 글대로 만약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면,
우리에겐 늘 고운 색깔의 바람만 불어오기를
까만 바람이 있다면 우리 곁을 부디 피해가 주기를
하지만 인생은 어쩌면 까만 바람이 더 많이 부는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피해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우리
바람에도 색깔이 있을까? (p.40)
봄에는 분홍 바람
초록 바람 부는 여름엔 초록 비 내리면
가을엔 알록달록 단풍 바람 불겠지
아마도
하얀 바람 부는 겨울엔
눈사람만 지나다니는
횡단보도가 생길지도 몰라
근데
까만 바람은 불지 않았으면 좋겠어
까만 새 울어대던 밤
병원 창문으로 들어오던
까만 바람이
사랑하는 할머니
하늘나라로 데리고 갔어
내 까만 옷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어.
마지막으로 저자의 남기는 글을 짧막히 담아본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동심이 시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동시집을 묶습니다. 늦잠 자던 동시들을 깨워서 첫 만남을 주선해 주신 고래책빵 편집진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시에 예쁜 날개옷을 입혀주신 그림작가 아몽 님 고마워요. 친구로 다가온 김소라와 칠 점 무당벌레, 쥐똥나무, 공갈빵도 고맙고요.
2024년 단풍이 꽃처럼 고운 10월에
예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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