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소소한 일상

일상다반사] 첫눈, 계절은 겨울

by 초이스초이스 2024. 11. 28.

40년 된 아파트가 유일하게 좋은 점은 크고 멋진 나무가 많다는 것. 어제 아침 출근길,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단풍이 아쉬워 뒤늦게 사진에 담아 앞동에 사는OO에게 전송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7년 차이지만 OO은 내겐 거의 유일무이한 소중한 이웃이다.

 
우리가 커피라도 같이 마셔본 적은 올해 봄이 마지막이었던 듯 하다. 그것도 맘스터치에서 30분이나 앉아있었을까. 결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출근길에 이렇게 종종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응원하는 애틋한 사이다.

내 출근길은 마침 OO의 동을 지나가는 길목이고, OO의 집이 1층이라 거의 매일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바로 답장이 오고 가지는 않아도 어차피 생사를 확인하는 정도의 안부문자이니 답장의 속도에 서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로 생각날 땐 집 앞에 슬쩍 과일이나 빵, 꽃을 두고 간다. 서로 연락도 없이. 지난달엔 우리집 앞에 고구마밭이라도 일궈놓은 양 고구마를 잔뜩 놓고 가는 바람에 한달내내 고구마만 먹으니 날 고문하는 건가 의심도 들었다.
 
내가 OO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건 어제로부터 3주 전 아침이었고, 그날은 문득 문자 대신 전화를 하고 싶었던 날. 한참 후에 전화를 받은 OO은 여보세요 대신 흐느끼기만 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다고 했다. 외과의사인 OO은 본인이 너무 늦게 조치를 취해서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난 그저 아니라고, 그래서그런 거 아니라고만 했다.

출근길 OO집 앞을 지나며 사진을 보낸 어제 아침은 3주가 지난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되지 않은 시간, OO에게 답장이 왔다.
 
연락 하나 보내기도 겁나하며 지낼 것 같아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힘줘서 고마워. 
 
어제 저녁 퇴근길은 비가 많이 내렸다. 택시를 타고 최대한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등을 쓰다듬으며 눈물만 흘렸다. 기운 내라는 말조차도 그녀에게 아픔이 될까 두려워 감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밤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바보 같은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지하철은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 여유로웠다. 내 마음은 한없이 복잡하고 슬프기만 했다.


힘낼 기력조차 없는 사람 입장에선 “기운내”라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 분발을 종용하는 건 위로일까, 아니면 강요일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 중에서>

 
오늘 아침, 아들이 샤워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눈도 뜨지 못한 채 의식과 상관없는 귀만 깨었다. 가뜩이나 아침잠이 많은데다 겨울이 되니 아침에 눈뜨기가 더더욱 힘들다. 반면 나와는 달리 최강 아침형 인간인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혼자 시리얼을 챙겨 먹으려는 지 냉장고 문을 조심스레 여는 소리가 들렸다. 시리얼 봉지가 바스락거릴까 봐 최대한 조심스레 봉지를 여는 소리,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는 소리가 기특하고 미안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어찌 내 배에서 저런 아침형, 배려형 인간이 나왔나 싶다. 미스테리다.
 
엄마, 나와서 눈 좀 봐봐.
 
내가 일어나길 내심 기다렸을 아들은 게을러터진 어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반가웠는 지 창밖을 가리키면서 방방 뛴다. 정말 아이 말대로 창밖의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7시인데 아들은 이미 나갈 채비를 끝내고 친구랑 공원에 가기로 약속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 좁고 복잡한 집구석에서 어떻게 용케 찾았는지 모를 눈오리까지 책가방 앞에 장전완료. 소울리스하게 꽂힌 오리를 보니 의식없이 끌려가듯 출근하는 날 보는 듯 해서 왠지 짠하다.

 
정말이지 어제의 계절과 오늘의 계절이 이리 다를 수가 있을까 싶을만큼 신기하게 바뀌어있다. 눈을 보니 밤새 한숨이나 잤을까 싶어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장례식장안에서는 밖에 눈이 오는 줄도 모를 텐데...  그래, 눈이 오면 눈이 와서 더 슬플테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더 슬플테고, 맑으면 맑아서 더 슬프겠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조차 원망스러울테지.

아빠가 딸 마음 아프지 말라고 따뜻한 이불 덮어주시나봐요. 따뜻한 밥 챙겨 먹고 개운을 내야 아빠 맘 덜 아파요. 밥 꼭 챙겨 먹어요. 맘껏 슬퍼할 수 있게
 
보낼까말까를 수없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렵게, 눈덮힌 동네의 사진을 담아 전송버튼을 눌렀다. 손톱만큼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뿐인데 혹여 이마저도 사치처럼 느껴질까 두렵고 미안하다. 어린 아들에겐 첫눈이 한없이 반갑기만한 오늘이, 누군가에겐 아무도 없는 벼랑 끝에 서서 절규하고 있을 오늘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벼랑 끝에 서게 될 그날이올까 몹시도 두렵다. 첫눈의 보드라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첫눈이 짓누를 무게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제의 계절과 오늘의 계절.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듯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에서>